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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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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생 상태 === 극히 열악했다. 제3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화학자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화장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화장실은 조명이 어둡고, 통풍이 잘 되지 않았다. 벽돌 바닥은 축축한 진흙으로 대충 쌓아 올려진 것 같았다. 세면대에서 나오는 물은 마실 수 없었는데, 그것에서 역겨운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물은 종종 단수되곤 했다. [[카포]]와 군인들은 오전 4시 30분에 벨을 울려 수감자들을 화장실에서 강제로 씻게 만들었는데, 불응하는 사람이나 행동이 굼뜬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한 곤봉 세례가 날아들었다. 화장실을 가는 것도 자유롭지 않았고 지정 시간이 있었기에 화장실은 언제나 사람으로 넘쳐났는데, 수용자들은 운이 좋으면 수천명, 운이 나쁘면 수만명과 함께 좁은 화장실을 사용해야했다. 화장실은 상태가 매우 불량했고, 절대적인 수요도 감당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비르케나우에는 구역당 화장실이 단 두 개뿐이었고, 수도꼭지 수는 90개에 불과했다. 막사 5~6개당[* 막사 하나 당 평균 수감자 수가 1,000명이었으므로, 대략 5,000~6,000명이 하나의 화장실을 사용한 것이다.] 화장실이 하나에 불과해 수감자들은 화장실을 정상적으로 쓰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화장실은 오물이 제대로 청소되지 않았고 죄수들을 동원해 허약하게 지었기 때문에 언제나 바닥이 질척거렸다. 이는 야윈 수감자들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은 기본적인 정수도 되지 않은 것이었고, 물을 마시는 것은커녕 세수를 하는 것조차 수감자들에게 메스꺼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카포와 군인들의 신발은 가죽제였지만 수감자들의 신발은 나무로 만들어진 나막신이었다. 그나마도 크기고 나발이고 아무렇게나 막 지급했기 때문에 신발이 맞지 않아서 맨발로 다니는 수감자도 있었다. 막사에는 평균적으로 700~1,200명이 수감되었다. 규정상으로 최대 수감 인원은 400~600명 정도였지만 실제로는 1,000명 이상이 수감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1944년 수십만의 헝가리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에 수용되면서 전쟁 말기에 막사는 말 그대로 미어터져나갔다. 사람들은 누울 자리도 찾을 수 없었고,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 좋은 자리에 누워서 잘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머리, 어깨, 발을 맞대고 자거나 좁은 자리라도 차지하려고 서로를 밀쳤다. 전쟁 말기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법의학자 니즐리 미클로시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기도 했다. >각 막사에는 800명에서 많으면 1,000명이 몰려있었는데, 잠을 잘때는 몸을 뻗을 수 없어서 새우잠을 잤다. 그리고 발이 다른 사람의 머리에 걸치기도 했고, 때로는 가슴이나 목에 걸치기도 했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자려고 인간적 존엄성을 포기한 채 서로를 밀고, 물고, 발로 차면서 몇 센티미터의 공간이라도 더 차지하려 노력했다. 그러한 잠마저도 잠을 잘 시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랐기에 너무나 소중하게 여겨졌다. 그나마 이 정도도 운이 좋은 경우에 속했는데, 나중에 가면 침대도 아깝다고 지푸라기 위나 흙바닥 위에서 잠을 자게 한 막사까지 있었다. 저녁 7시부터 자유 시간이 주어졌는데, 점호가 끝날 때까지 앉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탈출한 수감자들이 생길 때는 무한정 서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1940년에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 한 명이 수용소에서 탈출하자 군인들이 19시간 동안 수감자들에게 앉거나 눕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 명령을 거부하면 구타당했고, 운이 없으면 가스실에 던져질 수도 있었다. 이런 제한된 자유시간조차 유대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일부는 자신의 [[유대교]] 신앙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는데, 유대교 커뮤니티 속에서 [[랍비]]로 존경받던 몇몇은 시계나 달력이 주어지지 않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다른 수감자들의 도움을 받아 안식일과 주요 명절을 계산하기도 했다. 유대교 제사용 달력을 만들기도 했는데, 발각되면 엄한 처벌에 처해지거나 가스실형을 받았다. 그럼에도 랍비들의 집념은 꺾이지 않아 달력은 전후에도 2개나 살아남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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